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리코의 전투 (문단 편집) == 역사적 사실? == 실제로 1900년대 초반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예리코를 발굴한 결과에 의하면, 예리코는 기원전 16세기 가나안으로 군사 원정을 간 제18왕조의 초기 파라오들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Kenyon, "Palestine in the Middle Bronze Age," in CAH3, pp. 92-93; "Jericho," EAEHL, p. 563.).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왔을 때, 이미 예리코에는 사람이 아무도 안 살았는데, 구약성경의 묘사처럼 무슨 대학살극이 벌어질 일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여호수아기에서 묘사한 것처럼 이스라엘인들은 결코 가나안 원주민들을 말살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여호수아의 시대로부터 훨씬 이후인 판관기 무렵에도 이스라엘인들은 왕 같은 단일 지도자나 통합된 왕국 같은 정치 체제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던 부족 사회였고, 게다가 철기 무기를 만드는 방법도 몰라서 부족 연맹인 블레셋인들한테 수백 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았을 만큼 힘없던 집단이었다. 당시 헤브라이 족의 숫자는 성경에서 장정만 수십만이라고 쓰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많아야 만여 명, 일반적으로는 수천 정도로 비정된다. 참고로 "만여 명"의 숫자는 비농경 체제(즉 여진족 같은 반유목 반농경이 아닌, 몽골과 같은 완전한 유목 체제)의 제한된 공간 내에서 전근대 기술로 감당 가능한 인구의 일반적인 한계치다. 오히려 뒤의 내용인 판관기(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인들은 여부스인 같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원주민들의 바알 신앙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결정적으로 만약 구약성경의 내용처럼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인들이 여러 도시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해서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한 집단이었다면, 그 이후 오랫동안 블레셋인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 이유가 없다. 더구나 블레셋은 중동의 강대국인 이집트나 바빌론처럼 하나로 통합된 왕국이 아니라, 여러 개의 부족 연맹체였다. 여러 도시 국가들을 멸망시켰을 만큼 무시무시했던 이스라엘인들이 어째서 블레셋을 상대로는 그렇게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았단 말인가? 이는 터무니없는 모순이다. 다만 성경에서는 "신앙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이에 대한 매우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민족 개념이 없었던 전근대에 종교란 공동체 유지 수단이었으므로, 신앙을 잃는 것(=이교도가 내부에 대량 발생하는 것)은 ~~[[근데 이제 뭐함?|죽음을 의미하는 것]]~~ 사회 공동체의 붕괴로 직결된다. 다시 말해 하나의 통합된 국가가 되었다가, 종교적 분쟁으로 인해 국가가 충분히 결속력을 잃고 내우외환에 빠져 블레셋에게 지배당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도 단순히 "부족 연맹체"라는 이유만으로 통일 제국보다 약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칭기즈 칸|보여준 인물]]'''이 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생동감있게 묘사한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솝 우화처럼 다분히 가르침을 주려는 일종의 우화로 봐야 한다. 즉,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말살하고 그들의 문화를 철저히 파괴했다면 이스라엘인들의 전통 문화인 야훼 신앙을 순수하게 지켰을 수 있을 거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일방적으로 정복하고 멸망시켰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과장을 했던 것이다.(출처: 중동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85~87쪽). 하지만 실제로 성경을 정경적으로 읽어보아도 가나안 정복 전쟁이 가나안 전체를 말살한 듯이 얘기하지 않는다. 몇몇의 도시만 불태워졌고, 가나안 주민들과 협정을 맺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외부인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충돌과정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물론 신학적인 채색이 들어간 여호수아는 과장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고대근동 역사서에서 충분히 보이는 모습들이다. 아니면 블레셋인들이나 그 이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같은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인들이 "그래도 우리가 옛날 가나안 땅에 수십만이 몰려와서 닥치는 대로 원주민들을 다 죽였을 만큼 강했던 시절이 있었다!"라고 [[박씨전|정신적인 위로를]] 하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예리코의 전투 같은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무용담을 만들어서 구약성경에 넣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또 그렇다고 해서 여리고 전투가 아예 역사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후기설을 따르는 학자들은 예리코의 2020년 나이그로 박사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예리코가 기원전 16세기[* 정확히는 기원전 1550-1500년대 사이이며, 대체로 기원전 1500년경에 근접한 시기에 파괴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한다.]의 파괴 이후 재건되었다. 이 파괴에 대해서 이집트군[* Dever, William G. (2006). Who Were the Early Israelites and Where Did They Come From?. Eerdmans. ISBN 978-0802844163. pp. 45–46.] 뿐 아니라 이집트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이주한 힉소스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Kenyon, "Jericho," AOTS, p. 272; "Palestine in the Time of the Eighteenth Dynasty," CAH3, p. 528.][* Kenyon, "Palestine in the Middle Bronze Age," in CAH3, pp. 92-93; "Jericho," EAEHL, p. 563.]. 예리코는 이후에도 기원전 13세기까지 도시로 사용되었으며, 진흙 벽돌로 된 성벽(후기 청동기 시대의 성벽이며, 기원전 16세기에 파괴되었다는 성벽은 중기 청동기 시대의 성벽) 또한 존재했었다. 그리고 예리코에서 아멘호테프 3세(기원전 1388-1351년)의 인장이 발견되었으며, 다수의 무덤과 토기가 발견되었기에 기원전 16-15세기 이후의 예리코가 폐허는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예리코는 기원전 16-15세기의 붕괴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https://youtu.be/HCstm5DYnb4|Exodus Rediscovered: Conquest]] 기원전 16세기의 파괴 이전과 같이 강대한 도시는 아니었더라도 어느 정도 도시로서는 기능했을 것으로 보아 출애굽의 후기설을 따르는 학자들은 기원전 13세기에 예리코에 2차 파괴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리코가 재점유되었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발견된 파라오의 인장이 기원전 14세기의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3세의 것이라는 것은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의 배경과 예리코의 2차 파괴가 일어난 시기가 가나안에서 하비루(히브리인)들이 전쟁과 반란을 일으키던 기원전 14세기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며, 전기설의 주요 근거로서 작용할 수 있다고 전기설에서는 주장되지만[* 이 경우, 출애굽의 파라오가 반드시 아멘호테프 2세일 필요는 없다. 출애굽의 파라오가 아멘호테프 3세나 아멘호테프 4세(아케나텐)여도 이들이 모두 기원전 14세기 중엽의 파라오들이었기에 이들의 치세 기간과 40년(광야 생활, 그리고 여리고 전투의 시기를 조화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나이그로 박사에 따르면, 예리코 도시/텔(tell)의 여러 부분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 II 층(기원전 1400-1200년)을 발견했고 철기 시대(기원전 1200-586년)의 평탄화 작업으로 인해 최상층이 많이 절단되었다고 하는데, 나이그로 박사는 이가 예리코의 기원전 13세기의 유적과 흔적의 희소성을 설명한다고 한다[* Nigro, Lorenzo. (2020). The Italian-Palesinian Expedition to Tell es-Sultan, Ancient Jericho (1997-2015): Archaeology and Valorisation of Material and Immaterial Heritage.]. 즉, 당시의 여리고에 대해서 정복 전쟁이 없었다는 주장 역시 절대적이지 않으며, 이 시기에 여호수아의 전투가 일어났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솔은 기원전 13세기에만 파괴를 경험했기에 하솔 전투를 역사적으로 본다면, 여리고의 파괴 시기를 떠나서 후기설(기원전 13세기 설)을 채택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게리 A. 렌즈버그 교수는 후기설(기원전 13세기)의 주요 근거인 하솔이 기원전 13세기에 파괴되었는지 기원전 12세기에 파괴되었는지는 아직까지 확고히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며, 라기스(Lachish)가 한때 기원전 13세기에 파괴되었다고 여겨졌지만 후속 연구 결과로 인해 기원전 12세기에 파괴되었다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을 바탕으로 기원전 12세기에 파괴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여호수아서와 민수기에 언급되는 기브온(Gibeon), 아랏(Arad), 아이(Ai), 헤스본(Heshbon)을 포함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기원전 12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들이며, 므깃도와 다아낙은 기원전 12세기에 파괴를 경험했다는 것을 근거로, 출애굽과 여호수아의 정복기의 배경을 기원전 13세기가 아니라 이보다 후대인 기원전 12세기, 곧 청동기 시대 붕괴(기원전 1200-1150년)였을 것이라 제시하였다[* 이 시기는 이집트가 가나안에서 철군한 시기로 정복 전쟁 이야기에서 애굽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간 이유를 설명하는 듯 하다. 이집트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면,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가 되기에 가나안으로 도피하는 것은 집을 가출해서 집 앞마당에서 자는 것과 비슷한 논리가 되니 말이다.][* Gary Rendsburg, “The Date of the Exodus and the Conquest/Settlement: The Case for the 1100’s,” Vetus Testamentum 42 (1992), pp. 510-527.] 실제로, 예리코는 당시에도 점유되었으며,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세트나크테(기원전 1189–1186년)가 이집트에서 셈족 지도자 이르수(Irsu)와 그의 추종자들을 물리쳤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크놀 교수[* 겐즈버그는 그의 아들인 람세스 3세 때 있었던 셈족들의 이탈 사건으로 보고 있지, 세트나크테의 치세 때 있었던 일을 출애굽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에 의해서 출애굽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Knohl, I. (2019). [[https://thetorah.com/article/exodus-the-history-behind-the-story|Exodus: The History Behind the Story.]]].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